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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원

:::역사연혁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이 타이완으로 오게 되면서 타이완의 다원화된 문화 원류에서 지극히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역사를 거슬러 수 천년 문화의 귀중한 보물을 계승한 중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은 본디 중앙박물원 준비처에 속해 있던 것으로 다수가 고유물진열소의 소장품으로 러허(熱河), 선양(瀋陽) 행궁에 속한 것이었다. 오늘날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의 주체는 실제로 베이징, 러허, 선양 세 곳의 청대 궁정 유물을 한데 모은 것이다.

시작: 나라의 큰 경사, 고궁박물원 건립

본원의 소장품은 송, 원, 명, 청 네 왕조의 궁정 유물을 이어받은 것이다. 1924년10월 하순, 직계(直系) 군벌의 장성인 펑위샹(馮玉祥,1882-1948)이 베이징정변을 발발하고 섭정내각 총리 황후(黃郛)가 11월4일, 내각회의에서〈청 황실 우대조건 수정안〉을 통과시키면서, 퇴위한 황제 푸이(溥儀, 1906-1967)에게 「당일부터 영원히 황제 존호를 폐지」할 것과 청 황실은 「즉시 자금성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날 경기경위사령(京畿警衛司令) 루종린(鹿鍾麟,1884-1966)이 경찰총감(警察總監) 장비(張璧), 국민대표 이위잉(李煜瀛,1881-1973)과 함께 자금성 뒤쪽 침전으로 가서 선통(宣統)황제에게 존호를 폐하고 옥새와 궁전을 내놓고 황궁에서 떠날 것을 청하였다. 6일 국무원은 청 황실 사후처리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위잉을 위원장으로 초대하여 청 황실의 일원들과 함께 청궁정의 물품을 조사하였다. 1925년4월12일, 청 황실 사후처리 위원회는 고궁을 한번 보고 싶어 하는 사회 각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특별히〈고궁참관 임시 규칙〉을 발표하고 어화원(御花園), 곤녕궁(坤寧宮), 교태전(交泰殿), 건청궁(乾清宮), 홍덕전(弘德殿), 소인전(昭仁殿), 남서방(南書房), 상서방(上書房) 등의 장소(즉 고궁의 중앙노선)를 개방하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1-6시 사이에 관람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9월29일, 청 황실 사후 처리 위원회는 프랑스와 독일 등 각국 황실박물관의 선례에 비추어 고궁박물원을 세우고, 쌍십절 국경일 오후에 개막식을 거행했다.

1925년10월10일,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문을 열고 5가지 관람노선이 새롭게 만들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고궁 건립 초기, 불안한 정세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다. 다행히 좡원콴(莊蘊寬,1866-1932), 쟝한(江瀚,1857-1935), 천위안(陳垣,1880-1971)등 문화계 인사들이 후원모임을 조직하여 각 계파의 군벌들과의 중재를 통해 북양정부가 박물원 업무에 관여하는 것을 막았고, 때문에 고궁박물원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28년6월 국민정부가 북벌에 성공하면서 고궁박물원을 접수하고 <고궁박물원조직법>을 선포하여 고궁이 국민정부 직속임을 명시하고 아울러 이페이지(易培基,1880-1937)를 원장에 임명했다. 이원장의 임기기간동안 조직구조, 유물보관, 소장품 정리 및 관사의 보수와 개축, 전시진열, 출판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중국대륙시기 중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피난: 국보 사수를 위한 만리길 여정

1931년, 일본 관동군이 9.18사변을 발발하고 동북지역을 침략하면서 베이징과 톈진(天津)의 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고궁은 만일에 대비하여 중요한 소장 유물을 선택하여 상자에 보관하고 피난을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했다. 1933년 초, 일본군이 산해관까지 접근해 오면서 베이징은 위기에 빠졌고 고궁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유물들을 남쪽 상하이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2월6일부터 총 13,427상자와 64포대에 담긴 유물들을 다섯 무리로 나뉘어 이송을 시작했고, 5월23일 운반이 대부분 완료되었다. 유물진열소를 비롯하여 중앙연구원, 이화원(頤和園), 내정부(內政部), 국자감(國子監), 선농단(先農壇) 등의 유물도 함께 옮겨졌는데, 그 수량은 6,194상자와 8포대에 달한다. 이듬해 2월 국민정부는「국립 베이징 고궁박물원 임시조직 조례」를 공포하고 고궁과 그 이사회를 행정원 직속으로 개정했다. 5월 마헝(馬衡,1881-1955)이 원장 직에 임명되고 상하이에 보관된 유물과 베이징에 남겨진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1935년 고궁은 초청에 응하여 상하이에 보관된 중요한 유물들로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중국 예술 국제 전시회(International Exhibition of Chinese Art)」에 참가하여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1936년12월 난징 차오톈궁(朝天宮) 고궁 분원의 보관 수장고가 완공되면서 남쪽으로 이송된 유물들이 상하이에서 남징으로 운반되어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1937년, 77노구교(蘆溝橋) 사변이 발발하고 남쪽으로 옮겨졌던 유물들을 다시 세 경로로 나누어 후방으로 이송했다. 첫 번째(남로) 유물은 총 80상자로, 베이징에서 시작하여 한코우(漢口), 우창(武昌), 창사(長沙), 구이린(桂林)을 거쳐 구이양(貴陽)에 도착한 후, 다시 쓰촨(四川)성 바셴(巴縣)으로 운반되었다. 두 번째(중로)는 9,331상자에 달하는데, 한코우, 이창(宜昌)을 거쳐 충칭(重慶)에 도착한 후, 다시 이빈(宜賓)을 거쳐 러산(樂山)에 도착했다. 세 번째(북로)는 모두 7,287상자로, 쉬저우(徐州), 정저우(鄭州), 시안(西安)과 바오지(寶雞) 그리고 한중(漢中)을 거쳐 청두(成都)에 도착한 후, 다시 어메이(峨嵋)로 운송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비록 고궁의 업무는 보존과 보호가 중심이 됐지만, 몇몇 국내외 전시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1940년 초 고궁은 첫 번째(남로) 운반 유물 중에서 회화, 태피스트리, 옥기, 청동기 백 점을 선별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개최된「중국예술전시회」에 참가했다. 1942년 연말, 고궁은 또 중앙도서관 충칭 분관에서 열린 제3회 전국미술전시회에도 참여했다. 1943년12월부터 1944년4월까지, 마헝 원장은 전시 민심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시 첫 번째(남로) 운반 유물 중에서 서화명작을 엄선하여, 충칭 중앙도서관과 구이저우(貴州省)성립 예술관에서 「국립 베이징 고궁박물원 서화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쟁승리 후, 고궁은 서쪽으로 옮겼던 유물들을 바셴, 어메이, 러산의 순서로 충칭으로 이송시켜 한 곳에 모아, 다시 수로를 따라 베이징으로 돌려보냈는데, 모든 귀송 업무는 1947년 연말에 마무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고궁은 쓰촨성 주민들의 민족유물 보호를 위한 노력과 협조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러산 사무소 유물 중 역대 서화 명품을 골라 1946년 말 청두 중정공원(中正公園) 교육관을 빌려 전시를 열었고 이는 훗날「8년 항일 전쟁 이후, 문화사에 있어 성대한 행사」로 일컬어진다.

다른 한편, 중앙박물원 준비처도 항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을 피해 서쪽 쓰촨 지역으로 옮겨갔다. 중앙박물원은 1933년 교육부 행정원의 승인을 거쳐 난징에 설립되었고, 중앙연구원 산하 역사어언연구소(歷史語言研究所) 소장 푸쓰녠(傅斯年,1896-1950)이 준비처 책임자로 임명했다. 중앙박물원의 소장품은 중앙 정치회의 제 377차 회의 의결내용에 따라 내정부 유물진열소 유물이 이관된 것이다. 1937년 연말, 중앙박물원 준비처는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이송되는데 두 번째로 운반된(중로) 고궁의 유물들과 함께 수로를 통해 한커우로 옮겨진다. 이듬해 초 다시 쓰촨으로 이송됨에 따라 사무소를 신스(新市)에 개설하고 또 충칭대학으로부터 땅을 빌려, 중앙연구원과 함께 사피바(沙坪壩)에 임시 소장고를 지었다. 1939년5월 준비처는 쿤밍(昆明)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보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는다. 또, 고궁박물원의 두 번째로 서쪽으로 이송된 소장품들과 함께 다시 쓰촨성 러산으로 운반된다. 1940년 여름, 중앙박물원 준비처는 명령에 따라 다시 후방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등의 기관과 함께 쓰촨성 난시(南溪) 리좡(李莊)으로 옮겨간다.

1945년8월, 일본이 모조건 항복을 선포하면서,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전시상황에서 해제되었다. 리좡과 러산에 보관되었던 유물들은 1947년12월까지 모두 다시 수도로 이송되었다. 이듬해 5월, 준비처의 인문관이 준공되고 이를 기념하여 특별히 고궁박물원과 함께 성대한 연합전시회를 개최했다.

도착: 유물을 타이완으로 운반하여 박물관을 다시 열다.

1948년 가을, 국공내전의 전세가 역전되면서 11월10일 고궁의 상무이사 주쟈화(朱家驊,1893-1963), 왕스졔(王世杰,1891-1981), 푸쓰녠, 쉬홍바오(徐鴻寶,1881-1971), 리지(李濟,1896-1979), 항리우(杭立武,1903-1991)등은 웡원하오(翁文灝,1889-1971)이사장의 자택에 모여 회의를 열고 중요한 소장품을 선별하여 타이완으로 후송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주쟈화 선생은 중앙도서관 소장의 희귀본 도서들도 함께 옮길 것을 건의하였고, 푸쓰녠 선생은 중앙연구원 산하 역사어언연구소 고고학 관련 유물도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오도록 했다. 12월초, 중앙박물원은 이사회 회의를 열고, 가장 중요한 소장품을 골라 타이완으로 이송하도록 하는 한편, 그 나머지 소장품에 대해서도 교통편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운반해 오도록 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당일 고궁의 첫 번째 유물 320상자와 중앙박물원 준비처유물 212상자가 해군이 파견한 중딩룬(中鼎輪)에 실려 지룽(基隆)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중앙도서관, 외교부의 유물과 도서, 조약문서를 포함한 총240상자도 함께 실려 운반되었다. 1949년1월6일, 두 번째 유물을 운반한 투자유치국의 하이후룬(海滬輪)이 닻을 올렸다. 고궁소장 유물 1,680상자, 중국박물원 준비처의 486상자 외에,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중앙도서관, 베이징도서관의 유물과 도서, 역대지도가 포함되어 그 수량이 1,336상자에 달한다. 30일 세 번째 유물 운반을 담당한 해군 쿤룬호(崑崙號) 운수함이 출항했는데 그 안에 고궁유물 972상자,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154상자, 중앙도서관의 122상자가 실렸다.

각 기관의 유물을 담은 상자들이 타이완에 도착한 후, 양메이(楊梅)에 보관된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유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타이완 제당업 주식회사의 타이중(臺中) 설탕공장에 보관됐다. 1949년8월, 행정원은 전시상황에 응하여 특별히 고궁박물원, 중앙박물원 준비처, 중앙도서관 등 기관을 국립중앙 박물원과 도서관 연합 관리처(약칭 연관처)로 통합하고 교육부에서 총괄하였다. 1950년4월 연관처가 타이중 우펑(霧峰)의 베이거우(北溝)에 지은 유물수장고가 완공되고 타이완으로 옮겨온 유물 전부를 수장고에 보관하였다. 5월 행정원은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준비처 이사회를 다시 조직하여 공동이사회를 만들고 두 이사회의 직권을 대리했다. 1953년3월, 4년에 걸친 타이완 이송 유물에 대한 조사가 완비된다. 비록 전쟁기간 동안 수로와 육로를 통해 유물들이 여러 곳을 거쳐 옮겨졌지만 손상을 입은 예는 극히 적었다. 1956년12월, 베이거우 전시실이 준공되고 다음해 3월에 대외 관람이 시행되었다. 또한 연관처에서는 출판을 통해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으로 각종 목록과 도록을 간행했는데, 이들 자료는 지금까지도 중국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1961년5월, 연관처는 미국의 초청으로「중국의 국보(Chinese Art Treasures)」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여 미국 각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 후, 정부는 베이거우가 외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내외국인들의 관람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타이베이 근교 와이솽시(外雙溪)에 새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65년8월, 박물관 신축 공사가 완공되고 행정원에서는 중앙박물원 준비처의 타이완 이전 유물들을 고궁박물원에 합병시키고 〈국립고궁박물원 관리위원회 임시조식 규정〉을 발표하여 관리위원회를 행정원에 예속시킨다. 당월, 제1회 관리위원회에서 왕윈우(王雲五,1888-1979)선생을 주임위원으로 선출하고, 다시 장푸총(蔣復璁,1898-1990)선생이 원장 직을 맡는 안을 통과시킨다. 11월12일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신관이 준공되어 문을 연 개막식 당일, 서예와 명화를 비롯하여 청동기, 직물과 자수, 자기 및 옥기, 완상품, 도서, 문헌 등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총 1,573점의 유물이 6곳의 전시실과 8곳의 화랑에 배치되었고, 다음날부터 신관이 정식으로 대외 개방되었다.

전개: 뿌리를 내리고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하다.

타이중 연관처 시기,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준비처는 건물과 인원, 예산상의 한계로 박물관을 발전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업무는 대부분 목록작성과 보관에 국한되었다. 타이베이 와이솽시에 신관이 지어지고, 양원이 합병된 후 공간이 확장되고 인원과 예산도 늘어나게 되어, 고궁은 유물정리와 전시를 함께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개선되고 나날이 발전하게 되었다.

장푸총 원장의 임기동안 고궁은 지속적으로 건물과 규모를 확대해 전시면적을 늘리고 완전한 직제를 갖추게 된다. 또 국내외 소장가들 로부터 기물, 서화, 희귀본 고서들의 기증과 기탁보관을 받아 박물원소장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게 되었다. 전면적인 소장품의 분류와 목록편찬에 착수하여 일괄적인 유물 고유번호체계를 수립하여 소장품 관리 및 작품 선정과 전시가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물 보관용 상자를 교체하고 적절한 보관환경을 조성하였다. 또한 적극적으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상설전시와 주제전시를 열었다. 전문적인 전시안내자를 모집하여 각종 유물의 발전 과정과 관련 역사적인 사실들을 숙지하여 문화 예술 선양에 기여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무료 관람행사를 마련하여 문화예술 지식이 어린이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주요 유물의 전국 순회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하여 박물관의 사회교육 기능을 정착시켰다. 직원을 선발하여 해외로 연수와 시찰을 보내는 한편 전문적인 기술 인력을 양성했다. 대학들과 협력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박물원의 소장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감정과 연구를 진행했다. 해외박물관과 학술교류를 추진을 통해 연구원들의 조사와 연구의 성과를 더욱 확대했으며 각종 학술잡지와 도록을 발행했다. 고궁은 여러 방면에서 최선을 다하여 현대화된 박물관의 참신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1983년초, 친샤오이(秦孝儀,1921-2007)선생이 국립고궁박물원 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18년 동안 고궁은 행정원 소속으로 개편되어 조직체계가 원무 발전의 필요에 부합되도록 했다. 외적인 시설과 건축을 개선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간 설계에 있어 유물의 소장과 전시에 항온항습 환경을 마련했다. 과학적인 설비들을 부단히 업그레이드 시키고 가장 최신의 기자재로 역사유물을 보존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매년 유물구입 예산을 편성하여 소장품이 더 이상 궁정 유물에 국한되지 않도록 다각적인 공개 구입과 수집을 했다.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유물 전반적인 발전을 고찰하여 문화 예술 연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강화하였다. 유물에 대한 워크숍과 강연 행사를 자주 개최하고 박물관의 사회 교육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외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아 전문적인 훈련을 시행한 후 유물 및 전시안내 업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물관 내에 전통 원림(園林)의 개념을 한데 모은 정원을 조성하여 국민들에게 좋은 휴식 공간을 제공하였다. 타이완으로 이전 후, 두 번째 유물 조사를 시행하여 소장품의 완전성을 확보하고 아울러 대외적인 신뢰를 구축하였다. 제4차 확장 공사로 새롭게 지어진 도서문헌관은 연구와 조사를 위한 장소가 되었고, 아울러 다원화된 전시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국제 예술교류에 큰 힘을 기울여 우리나라가 연합국 탈퇴이후 국제 문화협력 참여에 어려움이 겪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고 미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서 개최된 전시는 훗날 고궁의 해외 대여전시에 본보기가 되었다. 국내 개인 소장가들과 함께 전시를 마련하여 사회적으로 옛 것을 아끼고 즐기는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중국대륙에서 출토된 유물을 선보이고 서양예술의 정수를 전시하여 국민들의 문화적인 시야를 넓혔다. 유물의 외부 순회전시를 개최하여 벽지지역의 일반인들도 박물원이 소장 유물의 정수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디지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소장품 관리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디지털 미디어 출판을 시작하였으며 인터넷을 통해 유물과 전시정보를 제공하였다

미래를 열다:새 천년, 새로운 계획들

2000년5월 이후 8년 동안, 국립고궁박물원은 두정성(杜正勝,1944- ) 스서우쳰(石守謙,1951- ), 린만리(林曼麗, 1954-)세 원장의 지도 아래 여러 가지 새로운 발전을 지속했다. 본토의식을 고취시키고 전시에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여 일반 대중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정관에 공공 공간을 조성하여 전시동선과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 정관 건축물의 내진성을 향상시키는 두 가지 공사를 진행했다. 또, 박물원이 소장한 핵심유물을 선정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나라에서 대여전시를 개최하여 본원이 소장한 유물과 예술이 지닌 최고의 아름다움과 이상적인 경지를 널리 알렸다. 또한 남분 분원 개관 계획을 수립하여 타이완 남부와 북부 문화건설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해외 유물을 수집하고, 국외 연구기관과 협력하여 아시아 각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여 남부 분원 소장품 전시의 기초를 마련했다. 박물원 소장 유물의 이미지와 브랜드에 대한 저작권 관련 업무를 실시하여 국내외 디자인업계에서 전통예술 요소를 결합한 관련 제품을 창조할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 창조 문화 발전에 힘을 보태고 소장품에 유행의 새로운 뜻을 지닌 문화 가치를 부여하여 새로운 현대화된 박물관을 향해 발전하게 되었다.

2008년5월부터 2016년5월까지 저우공신(周功鑫,1947- )과 펑밍주(馮明珠,1950- ) 두 원장 하에 조직 개편을 진행하고 관리 구조 완비하였으며 아울러 타이완 이전 이후 세 번째로 소장유물 총 조사를 마무리 지었다. 양안 박물관의 협력을 개척하여 공동 전시, 출판 등 교류의 새로운 방향을 도입하였다. 국내의 문화 창의 산업에 맞춰 일련의 발전 워크샵 교육 활동을 진행했다. 연령과 세대 별 교육활동을 기획하여 각종 형식의 문화교육과 예술 공연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또한 「고궁 확장」계획을 기획하여 개관시간대를 연장하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공간을 개선하였다. 디지털 소장의 성과를 이용하여 유물 전시 내용을 늘리고 일본 순회전시로 문화 외교를 추진하였으며 남부분원 구역에 시범운영을 완성하고 「10개의 머리」전시를 개막하였다.

전환: 제자리를 더 깊이 일구고, 세계로 향하자

국립고궁박물원은 방대하고 풍부한 문화 유물의 정수를 소장하고 있으며 인류 문화사와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보물들을 지키고 있다. 2016년 5월 린정이(林正儀, 1959- ) 원장이 본원 원장에 취임하면서 취임 초기, ‘제자리를 더 깊이 일구고, 세계로 향하자’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고궁의 행정 업무 계획들은 점차 ‘공공화’, ‘본토화’, ‘전문화’, ‘다원화’, ‘국제화’, ‘젊은이화’등 6개의 원칙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하고 풍부한 행사들이 본토와 연결 짓게 되었으며, 2016년 말 개관 91주년을 맞이한 국립고궁박물원은 세계적 박물관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2018년 7월, 천치난(陳其南, 1947- )원장이 이끌게 되면서 행정업무는 주로 북부 박물원 구역 내 공간 설비 개선과 강화를 포함하여 남원 공간 조경과 교통의 사전 개선 계획, 남원 박물원 구역 미래 소장품 전시 주제와 공간 배치 계획, 박물원 자체 및 국제 협력 주요 전시 활동 등으로 내용과 시설의 수준을 향상시킴으로 타이완 관중의 인정과 사랑을 얻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며, 타이완 본토의 사회 문화적 기초를 더 깊이있게 일궈나가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풍부한 역량을 쌓을 수 있었다. 2019년 2월 우미차(吳密察, 1956- )원장이 취임하면서 「관람객 중심의 원칙」을 제안하여 전체적인 서비스 품질을 제고시키고 새 고궁 계획을 추진하여 본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박물관으로서 지녀야할 전문성과 높이를 강화하였다.